본문 바로가기
덕질로 풀어보는 맥주 발효 이야기

베이커들이 싫어(?)했던 미생물(feat. 맥주 양조)

by 필리젬마 2023. 12. 11.
반응형

 

 

싫어했다기 보다 좋아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

맥주에 대한 역사를 들여다 보면 베이커와 맥주 양조장과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현대의 맥주 발효와 빵 발효에 똑같은 이스트(Saccharomyces cerevisiae)가 사용된다는 건 우연이 아닐 테니까.

 

 

 

 

특정 미생물(가령 이스트)만 뽑아서 사용할 수 있었던 시대는 양조 역사상 그리 길었던 편은 아니다.

시판 이스트가 개발된 게 1850년, 대량 생산으로 접어든 때가 20세기였으니 중세 시대의 맥주란 그야말로 사워도우의 액체 버전이라 할 만 했다.

맥주 한 잔에 Saccharomyces cerevisiae가 아닌 온갖 다양한 미생물로 바글바글한 게 당연했다는 말씀.

그래서 단일 미생물인 현재의 이스트를 분리해내기 전까지 자연발효의 맥주도 사워도우처럼 산미가 도는 것이 정상이었다.

 

 

 

유산균이 산미를 생성시켜 잡균을 억제하는 간접적인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다면...

(야생) 이스트는 빵이든 술이든 알콜 발효에 관여한다고 볼 수 있는데 베이커와 양조장이 이스트를 바라보는 시각은 약간 달랐던 것 같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것이 14-15세기 무렵의 기후 변화였다.

이때를 Little Ice Age라고 부르며 북미와 스위스 포함 북유럽 얼음지대가 넓어지면서 지구 온도가 대략 2.6도 낮아졌다고 한다.

 

 

 

이때부터 상면 발효가 아닌 하면 발효가 시작된다.

인류가 작정하고 시도한 의도라기 보다 대략 2세기 동안 달라진 기후에 미생물이 적응한 결과다.

맥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상면 발효, 하면 발효를 다들 아시겠지만 상면이 하면보다 발효 온도가 더 높다.

냉장 기술이 생긴 이후가 아닌 그 훨씬 전에 하면 발효가 시작됐다는 게 놀라울 따름.

 

 

 

하면 발효 후 상면에 비해 맥주맛이 좀 더 깊어졌다고 하는데(저온 발효의 장점이 여기서도 통한다) 미생물 이외에도 첨가되었던 허브 종류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으니 이건 논외로 하더라도...

양조장에서는 이후부터 하면 발효를 당연시한 것과 달리 베이커들은 기후 변화 후 달라진 빵 발효 때문에 불만이 있었다고 한다.

 

 

 

맥주가 높은 온도에서 발효되었을 때 주로 Saccharomyces cerevisiae가 활성화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맥주 발효 온도가 상대적으로 낮아지면서 Saccharomyces pastrianus가 주로 활성화되었고 결과적으로 베이커들 사이에선 논란이 되었다.

발효 주체가 바뀌면서 빵 발효가 느려졌기 때문.

그래서 어떻게 하면 Saccharomyces cerevisiae만 분리시켜 발효에 쓸 수 있을까에 대한 열망이 더 커졌다고...

그 결실이 1850년에 이뤄졌고 1,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많은 빵을 빨리 생산하던 방식이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제 시중의 맥주나 막걸리는 모두 Saccharomyces cerevisiae를 발효 주체로 쓴다.

게다가 이놈의 이스트가 정말 정말 많이 배합된다.

그래서 요즘 막걸리로 사전 반죽을 만들어 보면 두 배가 아니라 세 배씩 부푼다.

예전에 자연발효 막걸리로 사전 반죽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며칠을 놔둬도 반죽이 부풀지 않아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베이커들에겐 Saccharomyces cerevisiae가 답답한 속을 뻥 뚫어주는 획기적인 제품이었을 것 같다.

 

 

 

이제는 다소 느리더라도 복합 미생물에 의해 자연스러운 발효로 완성되는 식품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니 역사는 지인의 말마따나 헤겔의 정반합으로 굴러가는 게 맞는 모양이다.

사워도우나 자연발효 맥주(람빅) 모두 Saccharomyces cerevisiae의 수혜를 톡톡히 누린 지난 세기에 대한 반작용 같은 트렌드가 아닐까 한다.

 

 

 

 

 

 

 

반응형

'덕질로 풀어보는 맥주 발효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스트 이름이 맥주???  (0) 2023.11.04

댓글